연재 034 조선왕조실록 조선전기 절대권력 최대의 실력자 한명회와 그의 딸 예종비 장순황후 한씨 공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11. 06:1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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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34 조선왕조실록 조선전기 절대권력 최대의 실력자 한명회와 그의 딸 예종비 장순황후 한씨 공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장순왕후 한씨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봉일천리 산 15-1에 있는 사적 제205호인 공순영릉에는 장순왕후(8대 예종비)의 공릉과, 공혜왕후(9대 성종비)의 순릉,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진종)와 그 비의 능인 영릉이 있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자매지간이다.

장순왕후에 대해 알려면 그의 아버지인 한명회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전기 최대의 권력자 한명회의 본관은 청주, 자는 자준 호는 압구정, 사우당이다. 1415년(태종 15년) 예문관 제한 한상질의 손자로, 한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보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글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과거에 늘 실패하여 문음으로 1452년(문종 2년) 경덕궁직으로 관직에 들어섰다.

그 무렵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 등이 집권하자 한명회는 친구인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에게 접근, 무사 홍달손 등 30여 명을 추천하여 심복으로 삼게 하는 등 정치적 야망을 키워갔다. 그의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심복 참모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가 되고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 소윤에 올랐다.

장순왕후 한씨(1445.1.16~1461,12.5, 세종27년~세조7년, 17세) : 아버지는 청주한씨 한명회의 3째딸로 어머니는 고려의 문화시중 민지의 5대 손인 가정대부 한성부윤 민대생<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의 딸 여흥 민씨, 1445년에 태어났다. 1460년 4월 11일에 세자 예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461년(세조7년) 원손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17세에 죽었다. 1472년 성종에 의해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파주에 있으며 능호는 '공릉'이다.

<한명회 9남7녀, 여흥민씨(1남, 4녀), 연일정씨(정종화의 딸, 정몽주의 서손녀, 3남), 전주이씨(선천 공조의 딸, 5남 3녀)>, 동생 한명진(권람 동생 권제의 딸과 혼인)

장남 : 낭성군 한보(琅城君 韓堡, 1447년 ~ 1522년)(부인, 한성군 이훈(李塤)의 딸, 6남3녀)

장녀 : 한씨 - 신주(申澍)<고령부원군 신숙주 장남>의 처.

차녀 : 한씨 - 윤반(尹磻)<영천부원군 윤사로와 세종(후궁 상침송씨)의 딸 정현옹주의 장남>의 처. 슬하 2남 5녀.

삼녀 :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년 ~ 1461년) - 예종의 정비(正妃), 인성대군(5세졸)

사녀 :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년 ~ 1474년) - 성종의 정비(正妃)

한명회

1455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좌부승지, 우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까지 권력의 수직상승이 계속된다. 병약한 세자(덕종)가 죽고 세조의 둘째 아들 황(예종)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한명회는 세째딸을 세자빈(장순왕후)의 자리에 앉혀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세조의 총애를 받던 그의 딸은 바로 다음해 원손을 낳다가 요절하고 만다.

한명회는 권람 신숙주 등과도 인척관계를 맺고 세조의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란을 꾀했다는 혐으로 신문을 당하다가 혐의가 없어 석방된 것은 1466년의 일이다. 정치적인 위협을 느껴서인지 한명회는 네째 딸(공혜왕후)를 세조의 손자이자 덕종의 둘째 아들인 혈(성종)과 결혼시켜(1467년) 세조와 겹사돈을 맺었다.

잠시 주춤했던 권력의 상승은 1468년 세조의 승하 뒤에도 계속되었다. 비록 장순왕후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사위인 예종이 즉위하자(1468년) 그 이듬해에 다시 영의정에 복직된 것이다.

공혜왕후 한씨

공혜왕후 한씨(1456.10.11~1474.4.15, 성종5년 19세) : 아버지는 청주한씨 한명회의 4째딸로 어머니는 고려의 문화시중 민지의 5대 손인 가정대부 한성부윤 민대생<단종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의 딸 여흥 민씨, 1467년 12세의 나이에 한살 어린 자을산군과 가례를 올렸다. 몸이 약함. 세조비 정희왕후는 덕종의 장남인 월산대군을 왕위에 세우려고 했으나 한명회의 주장대로 사위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세웠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한씨는 1469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능은 파주에 있으며 능호는 '순릉' 이다.

 

장순왕후에 이어 사위인 예종도 14개월의 짧은 재위기간을 마감하고 요절했지만 그의 천운은 끝나지 않았다. 예종의 아들은 아직 제안대군은 4세 이고, 덕종의 큰 아들 월산대군은 병약했다. 결국 세조의 비인 정희대비는 신숙주 한명회등 대신들과 의논하여 덕종의 둘째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했다. 바로 한명회의 사위였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고 자신의 딸이 왕비에 책봉되자 한명회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공혜왕후도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소생 없이 승하했다.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기까지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한명회는 네 번이나 1등 공신으로 추대,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엄청난 부를 누리다가 1487년(성종 18년) 73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후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 폐사에 관여했다 하여 부관참시되었으나 뒤에 신원되었다.

파주 삼릉_공릉 순릉 영릉

세조가 "나의 장량" 이라고까지 불렀을 만큼 조선 전기 3대의 왕을 거치며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한명회, 두 명의 딸을 왕후의 대열에 올린 아버지, 그의 딸이 바로 이곳 공릉에 잠들어 있는 장순왕후 한씨이다.

당대의 문벌 가문에서 태어난 장순왕후 한씨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1460년 4월 11일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그 책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아! 그대 한씨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유하고 아름답고 정숙하여 종묘의 제사를 도울 만하므로 이제 효령대군 보와 우의정으로 잉령치사한 이인손 등을 보내 그대에게 책보를 주어서 왕세자빈으로 삼는다. 그대는 지아비를 경계하고 서로 도와서 궁중의 법도를 어기지 말고 더욱 큰 왕업을 융성하게 하라"

세자빈이 산후병으로 1461년 12월 5일 안기의 집에서 눈을 감으니 열일곱의 어린 나이였다. 1462년 2월 17일 세조는 왕세자빈에게 장순이란 시호를 내렸다. 2월 25일 파주의 보시동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1470년(성종 1년) 능호를 공릉이라 했고, 1472년에는 장순왕후로 추준되었다. 공릉은 당초 왕후릉이 아닌 세자빈묘로 조성되어 봉분의 난간석과 병풍석이 생략되었고, 석양 석호 각 두 마리만 능을 보호하고 있다.

봉분 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있으며 양쪽 끝에 석마와 문인석이 서 있다. 문인석은 홀을 쥔 손의 양식이며 옷주름 등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따르고는 있으나 수법이 서투르고 선이 모두 굳어 있다. 또한 풍화작용으로 마멸이 심하고 입이 유난히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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