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35 조선왕조실록 예종과 남이 예종의 계비 안순황후 한씨 서오릉 창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12.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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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35 조선왕조실록 예종과 남이 예종의 계비 안순황후 한씨 서오릉 창릉에 대해 알아봅니다.​

서오릉(西五陵)은 동구릉(東九陵)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실의 왕릉군으로, 5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덕종)의 묘(현 경릉)를 처음으로 만든 이후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경릉(敬陵)이라고 개명하고, 덕종비 소혜왕후가 훗날 경릉에 같이 안장된다. 이후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창릉(昌陵), 19대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明陵), 21대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이 차례로 조영되었다.

창릉_예종릉

총면적이 55만 평이 넘는 넓은 이곳에는 왕릉과 왕비릉 외에도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과 1970년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 문형리에서 이장해온 대빈묘(경종의 생모 장희빈의 묘)가 있어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의 왕실 족분을 이루고 있다.

창릉_안순왕후릉

사적 제198호인 서오릉의 첫번째 능인 창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동원이강 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석물의 배치는 <국조오례의>의 예에 따랐다. 다만, 특이하게도 상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에 귀면을 조각하지 않고 문고리를 새겨 넣어서 그 생김새가 진짜 북과 같다. 또한 대석주의 주두는 둥그런 원수 아래 환상 받침을 마련하고 사각 석주 형식을 이루고 있다.

안순왕후의 무인석과 석마

안순왕후 한씨(1445.3.12~1498.12.23, 연산군 4년, 53세 졸) : 아버지는 청주한씨 청천부원군 한백륜으로, 1461년 장순왕후 한씨가 죽자 1462년에 세자빈에 간택되었고, 1468년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469년 예종이 병으로 죽자 인혜대비로 봉해졌다(1471년). 1479년(연산군 3년) 다시 명의대비로 개봉되었다. 1480년 12월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의 '창릉'이며 예종과 함께 묻혔습니다. 소생으로는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다.

제안대군(1466.3.8~1526.1.6, 59세 졸) : 예종과 안순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인성대군이 어릴 때 죽자 왕위 계승후보로 1순위 였다. 그러나 예종이 20세에 승하하자 그때 나이가 4세 였다. 이에 세조비 정희왕후는 한명회와 결탁하여 자을산군(한명회의 사위)을 왕으로 지목했다. 제안대군은 평생 권력에 욕심을 갖지 않고 노래와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효성이 지극했다.

조선의 제8대 왕인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32년) 1월 15일에 태어났다. 이름은 황이고 자는 명조이다. 1455년(세조 1년)에는 해양대군에 봉해졌으나, 1457년(세조 3년) 9월 2일 세자가 병으로 요절하자 이 해 12월 15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468년 9월 7일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비는 영의정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이다. 예종은 세조가 설치해 놓은 원상제에 따라 즉위 초 3중신인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중심이 되어 국정을 상의 결정케 했다.

예종 즉위년인 1468년에 남이, 강순 등의 무인이 역모의 죄로 처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남이는 제3대 태종의 외손자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서북변의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혁혁한 무과를 세운 무인으로 27세에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공조판서를 겸임하다가 병조판서에 발탁되었으나 예종이 즉위하자, 강희맹, 한계희 등 훈구대신들이 그가 병조판서의 직임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하자 평소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예종에 의해 해임되어 겸사복장(종 2품)이 되었다.

남이(1441~1468, 세종 23년~예종 즉위년) : 태종의 4녀 정선공주와 의산군 남휘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정선공주가 세종 6년에 죽은 것으로 보아 남이는 후실의 소생이거나 정선공주의 양자인 듯 하다. 세조 3년에 무과에 장원급제. 1467년 포천지역의 도적을 토벌하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을 구성군, 유자광과 함께 토벌해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됨. 또한 서북면의 여진족 토벌과 압록강 건너 파저강 유역의 야인을 공격해 세운 공으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곧이에 병조판서(정2품-대감)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유자광(병조 참지-정3품)의 모함으로 국문끝에 능지처참을 당하였다.(영의정 강순도 연루되어 처형됨) 순조 18년에 영의정 남공철의 상소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그후 그가 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다" 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했는데 이를 유자광이 엿듣고 역모를 꾀한다고 예종에게 알리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남이를 비롯한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량, 고복로 등 많은 무인들이 죽고 그외 다수가 처형당했다.

예종의 재위기간은 14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짧은 재위기간 동안에 직전수조법을 제정하고 삼포에서의 왜와의 사무역을 금했으며, <경국대전>을 최항 등이 찬진했으나 반포는 보지 못했다. 1469년 11월 28일에 경복궁 사정전에서 보령 20세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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