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037 조선왕조실록 마녀 재판의 첫 희생자가 되다. 폐 제헌왕후 연산군모 폐비 윤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2024. 4. 15. 06:00백촌 김문기 선생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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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37 조선왕조실록 마녀 재판의 첫 희생자가 되다. 폐 제헌왕후 연산군모 폐비 윤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폐비 제헌왕후 윤씨

마녀재판의 첫 희생자가 되다

아침부터 까마귀가 다 쓰러져가는 초당에서 폐비인 제헌왕후 윤씨 모녀집에서 반갑게 울어댔다. 얼마전 환관 안중경이 다녀갔기 때문에 내심 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저녘 무렵 좌승지 이세좌와 조진이 찾아와 청천벽력 같은 어명을 전한다.

"폐서인 윤씨는 사약을 받으시오"

윤씨는 하얗게 질린 상태로 화려한 중전옷으로 갈아 입고 사약을 단숨에 삼킨후 흰 명주적삼에 터져나오는 피를 뱉었다. 그녀의 죄목은 단 하나, 투기였다. 조선 사대부들이 부인을 쫒아낼 수 있는 칠거지약 중 하나인 투기, 조선조 비합리적인 남성우위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인 첫 희생자가 연산군의 생모 폐 제헌왕후 윤씨였다.

폐비 윤씨(1455.7.24~1482.9.7, 27세) : 판봉상시사(봉상시(奉常寺)의 으뜸 벼슬. 정3품) 윤기견과 부부인 고령 신씨<신진평의 딸로 윤기견의 둘째부인> 연산군의 어머니, 본관은 함안으로 고려 윤관 장남의 후손임<정희왕후,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숙빈 윤씨등은 윤관의 4남 후손임>. 외가 쪽으로는 친정어머니의 친사촌오빠가 신숙주임. 1473년 숙의(종2품)로 책봉되었고, 성종보다 두살 위였다.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녀는 1474년 공혜왕후(한명회 3째딸)가 죽자 왕비에 올랐다(1476.9.5). 그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아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녀는 질투심이 많았고 후궁에 대한 감시가 심했다. 비상을 숨겨두기도 했고 후궁들을 저주하는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급기야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어<야사> 궁궐에서 쫒겨나(1479.8.16) 친정에서 지내다 1482년 사사된다.

허종과 허침은 입궁하지 않고 일부러 굴러 떨어져 갑자사화를 피함<야사>. 인수대비와 후궁들의 모함과 반성하지 않는 태도로 인해 성종은 사약을 내렸다. 이 사건은 금언령이 내려지고 세자 융은 생모의 존재를 모르고 자랐다. 연산군 즉위후 임사홍등이 그녀의 존재를 알려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아들 안양군, 봉안군), 귀인 엄씨, 등이 살해되고 인수대비 또한 머리를 받쳐 죽는다. 폐비 윤씨의 묘는 경기도 장단에 마련되고, 성종은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 연산군 즉위후 제헌왕후로 추승되고 묘도 '회릉' 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윤씨의 관작이 추탈되고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다.

 

확고부동해지는 중전의 위치

윤씨는 판봉상시사(정3품) 윤기견과 장흥부부인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현감(종6품) 윤응이다. 윤기견은 세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찬(정6품)직을 지냈다. 문종때는 춘추관의 기사관(정6품)으로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가난한 학자였던 윤기견은 원래 이온의 딸과 혼인한 적이 있었고, 둘째부인 신씨는 신진평의 딸이었다.

윤씨는 장성하여 궁녀로 보내졌는데 서늘한 느낌이 들 정도로 미색이 뛰어나 금방 성종의 눈에 띄었다. 윤씨는 내명부 정2품 숙의로 봉해졌고,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품이 후덕하여 대왕대비였던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도 그녀를 귀여워하였다. 성종의 첫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19세의 나이로 소생도 없이 세상을 떠나자 2년후 정희왕후 윤씨에 의해 왕비로 책봉된다. 왕비책봉의 전문은 이렇다.

"곤위가 오래 비어 있어 위호를 정하지 못하였다. 위로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 일국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다할 사람을 정하고자 한다. 숙의 윤씨는 주상이 소중히 여기고 나도 가한 줄로 안다. 윤씨는 일상생활에서도 좋은 옷을 입지 않고 항상 검소하다. 또 모든 일은 정성스러워 국가의 큰일을 맡길 만하다. 윤씨는 나의 뜻을 알아라"

그 후 한 달 뒤 성종은 밀성군(세종, 신빈김씨 3남)과 좌찬성(종1품) 노사신을 보내 숙의(정2품) 윤씨를 왕비로 책봉한다는 책문을 내렸다. 이때 윤씨 뱃속에는 아기가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훗날 왕위에서 쫒겨나 사사되는 패주 연산군이다. 아들까지 순산하자 윤씨의 위치는 더욱 확고부동해졌다.

후궁들간 투기로 인해 폐서인되다

윤씨가 왕위에 오른후 성종은 소용(정3품) 엄씨와 정씨의 처소를 찾는다. 두 사람은 집안도 한미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윤씨가 국모에 앉은 것이 못마땅하였다. 그래서 인수대비 한씨를 찾아가 윤씨를 모략하였다. 성종은 물론 시어머니마저 후궁들을 감싸고 돌자 윤씨는 더욱 고립감에 빠져들고 어머니 신씨에게 의지할 뿐이었다. 또한 성종이 자신을 멀리하고 후궁들을 끼고 있으니 불안한 마음에 어머니 신씨의 권유로 '송장방사'라 하는 후궁의 길목에 사람의 뼈를 묻는 미신적인 방법들을 사용하게 된다. 또한 소용 정씨와 엄씨가 서로 내통하여 윤씨 자신과 연산군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내용의 투서를 감찰상궁이 이름으로 숙의(종2품) 권씨에게 보낸다는 계략이었다. 며칠후 윤씨처소에서 성종은 쥐구멍을 막아놓은 투서와 같은 종이를 발견하고 비상과 저주할 때 사용하는 방량 서적을 발견하게 된다. 성종이 다그치자 윤씨는 친잠(직접 누에를 치는 일-창덕궁 후원에 친잠단을 조성함)할 때 몸종 삼월이가 가져온 것이라고 핑계댄다.

그러나 이 모든일이 윤씨의 계략임을 안 성종은 조정 신하들을 불러 윤씨를 폐서인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신하들이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예조판서 허종은 윤씨를 사제에 거처토록 하고 빈의 예로서 대접하는것이 어떠냐고 하였고, 영의정 정창손은 별궁에 지내게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날 삼월이를 국문하여 "방량서는 전 곡성현감 이길분의 첩 집에서 얻은 것으로 사비에게 언문으로 등사시켰고, 비상은 신씨가 준 것이오. 이것을 작은 상자에 넣어 석동을 시켜 감찰상궁의 집으로 보낸 선물이라 거짓말을 하였소"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하고 삼월이는 처형당하였다.

정소용 엄소용

이 사건으로 신씨는 직첩이 몰수당했고 궁으로 왕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윤씨의 생일이 되어 성종은 그간 서운함을 달래주려 했다가 소용 엄씨와 정씨가 인수대비에게 성종이 윤씨의 생일잔치를 즐기고 있다고 고자질하여, 인수대비 한씨는 성종을 불러내고 엄씨와 정씨는 성종을 유혹하여 후궁의 처소로 들게 하였다.

분기탱천한 윤씨는 후궁의 처소로 달려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내훈까지 지어 여인들을 교육하고자 했던 인수대비는 당장 윤씨를 폐서인하라고 명령하였다. 성종 또한 중궁을 폐위코자 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창손, 한명회, 윤필상, 좌승지 김승경 등은 찬성하였고 도승지 홍귀달, 좌부승지 김계창 등은 원자와 대군을 낳은 윤씨를 폐서인하는것은 불가하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성종은 단호하게 즉시 폐서인시켜 궁궐 밖으로 쫒아내야 한다고 하였다.

윤씨의 폐서인 결정이 알려지자 대사헌 박숙진, 대사간 성현, 홍문관 직제학 최경지, 전한 이우보 등은 왕비의 죄명이 명확하지 않다며 반기를 들었다. 이우보는 반대하다 의금부에 갇히고 조위가 대신하여 윤씨를 폐한다는 글을 써서 종묘에 고하였다.

대간의 젊은 학자들과 성균관 유생 65명은 죄도 명확하지 않은 왕비를 폐위시킨다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제히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성종의 강경한 태도로 사건은 일단락 되었고, 윤씨는 어머니 신씨와 함께 지낼수 있으나 동생, 친척들과의 왕래는 일절 금하였다. 성종 10년 6월 13일 결국 윤씨는 궁궐에서 쫒겨났다.

폐비 윤씨_연산군

모함 때문에 받아든 사약

쫒겨난 윤씨는 어머니 신씨와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궁궐에서 쫒겨난 지 10일 후에 윤씨도 모르는 사이에 둘째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폐비가 된후 대사간 윤숙진이 윤씨의 생활을 알아보기 위해 몇차례 그 집앞을 지나다녔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에는 적막하기 그지 없고 굴뚝에는 연기조차 나지 않았다. 박숙진은 윤씨의 처지가 딱해 윤씨를 별전에 두어 조석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성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에 우의정 홍응, 도승지 홍귀달 등이 찬성하였으나, 성종은 대사헌 박숙진을 의금부에 가두어 버렸다.

중전 간택령이 내려지자 장흥고 주부(종5품) 장윤정이 성종은 지금 후궁이 5명이나 두고 있기 때문에 다른 처녀를 간택하는것은 부당하다고 상소하였다.

그래서 윤씨 쫒겨난 다음 해에 후궁으로 있던 정현왕후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정현왕후 윤씨(1462.6.25 ~1530.8.22, 68세 ) : 아버지는 파평 윤씨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이며 어머니는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로, 충청도 신창의 관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윤창년. 1473년 12살의 나이로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종2품)에 봉해졌다. 1479년 윤씨가 폐출되자 1480년 11월에 성종의 3번째 왕비에 봉해졌다. 윤씨 폐출에 깊이 관여했고 성종의 윤씨 복위를 인수대비와 함께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세자 융을 친자식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그녀가 생모인줄 알았다. 그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1494년) 1497년에 자순왕대비에 봉해졌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을때 박원종의 의견대로 진성대군(중종)을 즉위 시키는 것을 허락하고, 중종 즉위후 경빈 박씨와 복성군의 죽음등에 깊이 관여했다. 1530년 68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소생으로 신숙공주(1478년생-요절)와 중종(1488년생)이 있다. 능호는 '선릉'으로 성종의 묘와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정현황후는 자순, 화혜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능호는 선릉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성종의 묘와 다른 언덕에 안장되어 있다.

폐비 윤씨에 앞장섰던 인수대비 한씨 소용엄씨 정씨는 윤씨를 모략하기를 윤씨가 궁궐을 나가면서 10년을 살 만큼의 금은보화를 챙겼다든지, 전혀 반성의 기미도 없이 몸치장에만 열중한다는등 성종에게 거짓으로 고했던 것이다. 성종은 한편으로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이 있어, 환관 안중경을 시켜 윤씨의 동정을 살펴오라고 명하였다. 하루 하루 근신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윤씨를 보고 안중경은 가슴이 아팠다.

안중경이 궁궐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수대비 한씨는 주상에게 윤씨가 매일 곱게 머리를 빗고 화장하고 조금도 뉘우치는 빛이 없더라고 거짖 상주하게 한다. 또한 소용 엄씨와 정씨도 금은보화를 안중경에게 쥐어 주었다. 이에 안중경은 거짓 보고를 하게 되고 성종은 분기탱천하여 선정전에서 윤씨 문제를 상의하였다. 영의정 정창손, 한명회, 심회, 윤필상 등은 후일 연산군이 즉위하면 윤씨가 무슨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며 사약을 내리자고 하였다.

폐비 윤씨와 어머니 신씨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가 좌승지 이세좌와 내관 조진이 찾아와 사약을 내리자, 잠시 아연실색해 있던 윤씨는 단단히 각오한듯 중전의 옷으로 갈아입고 사약을 마셨다. 눈을 부릅뜬 윤씨는 입고 있던 흰 명주적삼에 붉은 피를 토했다. 그리고 어머니 신씨에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원자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으로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고 또 나를 임금이 거동하는 길옆에 장사해 그의 행차를 보게 해주시오"

폐비윤씨_전혜빈 열연

피 묻은 흰 명주적삼

처음 성종은 죽은 윤씨를 묘비도 업이 안장시켰다. 그러나 연산군의 즉위를 생각하여 성종 20년 '윤씨지묘'라는 묘지명을 세우게 하고 장단 도호부사에게 절기마다 윤씨의 제사를 지내게 하는등 7년 만에 약간의 배려를 했다.

자신의 생모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도 모른채 8세에 연산군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후 성종은 100년 동안 폐비 윤씨의 사건은 절대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피 묻은 명주적삼의 비밀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인 임사홍이 이 비밀을 너지시 연산군에게 알렸다.

임사홍은 1498년(연산군 4년)에 있었던 무오사화로 인해 제거된 사림파의 잔존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폐비 윤씨 사건을 들쳐내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는 연산군과 가까운 사이로 임사홍을 통해 연산군과 그의 외할머니인 신씨를 만나게 하여 폐비 윤씨의 원한 맺힌 사연을 듣게 된다.

"소용 엄씨와 정씨의 투기 때문에 모함을 받고 쫒겨났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피 묻은 명주 적삼을 보고 소용 엄씨와 정씨를 내정으로 끌어내 직접 쇠도리깨로 격살한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인수대비 또한 머리고 받아버려 몇일후 한씨는 세상을 떠난다.

인수대비가 죽자 연산군은 하루를 한달로 계산하는 '역월지제'라는 기발한 복상제도를 만들어 3년복을 25일에 끝낸다. 또한 소용 정씨의 두 왕자인 안양군과 봉안군 마져 죽여버린다. 윤씨 폐사에 관여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중,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명이 처형당했고,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 참화가 갑자사화이다.

회릉

윤씨는 사후 22년만에 아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로 복위되고 묘호는 회릉으로 개칭되었다. 갑자사화로 윤씨의 원한은 해소되었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폐위되어 사사되고, 윤씨는 다시 서인으로 강등괴고 회릉은 회묘로 격하되었다. 현제 윤씨의 능은 경기도 서삼릉 경내에 있다.

조선 역사상 가강 드라마틱한 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달리 생각하면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품이 후덕하고 검소한 윤씨가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후궁들의 투기와 조급함으로 자신을 다스르지 못하여 폐사되고 다시 신원되는 과정에서 역사의 아픔이 느껴져 가슴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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