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1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곳이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비바람이 창창할 뿐이니 한바탕 울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熱河日記 언젠가는 한번 포스팅 ..

2024. 1. 10. 06:00마음공부_책_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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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1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곳이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비바람이 창창할 뿐이니 한바탕 울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熱河日記

 언젠가는 한번 포스팅 하고자 했던 조선시대 중상학자이자 실학의 대가 박지원 선생의 일대기와 작품 열하일기등 써내려 갑니다.

 

  • 박지원(1737~1805) 선생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입니다. 1765년 일부러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않았고, 이후에는 학문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저서로는 북학파 실학자 연암의 철학이 담긴 《열하일기》, 소설인 《허생전》이 있습니다. 이후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 문음으로 출사하게 됩니다.
  • 그 뒤 1786년에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토목,영선,시탄>감역<종9품>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종6품>, 1791년 한성부판관<종5품>,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종6품>,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종4품>, 1800년 양양부사<종3품>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노론의 한 분파인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그 영수가 되었습니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서 민중들의 삶을 위해야 한다면서, 상업과 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실례로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를 본받아서 수레를 사용하고 벽돌제조 및 도로를 닦아서 생필품들을 널리 사고팔도록 해야, 민중들이 생필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북학파라고 합니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오우아> 등이 있습니다.

 

연암집

  • 박지원 선생의 생애를 간략히 알아봅니다.
  •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해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이 양육하였습니다. 1752년(영조 28, 16세)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면서 『맹자(孟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 특히 이보천의 아우 이양천(李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비롯해 주로 역사 서적을 교훈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습니다.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했으며,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평생 문우로 지내면서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습니다.
  •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습니다. 학문이 뛰어났으나 1765년 처음 과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후로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습니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 · 이서구(李書九) · 서상수(徐常修) · 유득공(柳得恭) ·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습니다.
  • 이때를 전후해 홍대용(洪大容) · 이덕무(李德懋) · 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해 자주 토론했으며, 이 무렵 유득공 · 이덕무 등과 서부 지방을 여행하였습니다. 당시 국내 정세는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벽파(僻派)였던 박지원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박지원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합니다.

박지원의 글씨

  •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습니다. 1780년(정조 4)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자, 수행(1780년 6월 25일 출발, 10월 27일 귀국)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 ·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이며, 이 속에서 평소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저술로 인해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했으나 문원(文垣)에서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 안의현감 시절에는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은 『과농소초(課農小抄)』 ·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 『안설(按說)』 등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박지원이 남긴 저술 중에서 특히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위의 책들은 박지원이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작업의 하나입니다.
  • 특히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강조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때는 명(明)에 대한 의리와 결부해 청(淸)나라를 배격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속에서 박지원의 주장은 현실적 수용력이 부족했으나 당시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에게 강한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열하일기 기행루트

  • 북학사상(北學思想)으로 불리는 박지원의 주장은 비록 청나라에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해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인식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개선책을 제시했으며, 나아가 역대 중국인들이 우리에게 갖는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방법도 서술하였습니다.
  • 박지원는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근원을 이해하려 한 것이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애착을 보인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홍대용과의 교유에서 보이는 우주론의 심화를 위한 작업이며, 실제로 북경을 여행할 때 천주당이나 관상대를 구경하면서 서양인을 만나고 싶어하였습니다.
  • 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박지원이 펼친 우주의 질서는 당시의 중국학자들도 놀라게 했으며 이는 박지원이 가진 세계관의 확대와 전환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朱子學)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박지원 묵죽도

이 생각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주창이었으나 과감한 개혁 의지의 한 표출로 나타났습니다. 이 같은 생각을 집약한 것이 곧 이용후생 이후에 정덕(正德)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이는 정덕을 이룬 뒤에 이용후생을 추구하는 방법과 비교할 때 발상의 일대전환이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박지원이 주창하는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요체이며 이를 위해 제시한 것들은 자기 주장의 완성을 위한 방도입니다. 그 방도의 구체적 현상은 정치 · 경제 · 사회 · 군사 · 천문 · 지리 · 문학 등의 각 분야에서 나타났습니다. 특히 경제 문제에서는 토지개혁정책 · 화폐정책 · 중상정책(重商政策) 등을 제창했으며 현실의 문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미래의 비전을 찾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박지원이 남긴 문학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곧 당시 주조를 이루는 복고적 풍조에서 벗어나 문학이 갖는 현실과의 대립적 현상을 잘 조화시켜, 시대의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수렴할 수 있는 주제와 그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 이것은 박지원의 사고가 고정적 관념에서 벗어나 일대 전환을 시도한 것과 맥락을 이루며, 문학 작품의 매개체인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고 당대에 맞는 문체 개혁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열하일기 본문

  • 표현의 절제와 문장 조직 방법의 운용, 사실적인 표현 등은 박지원이 생각한 당대의 현실과 문학과의 관계를 연결짓는 방법들이었다. 이는 문집 속에 수록된

당시 교유했던 사람들의 문집서(文集序)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박지원이 남긴 일련의 한문 단편(漢文短篇)들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 초기에 쓴 9편의 단편들은 대체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나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 혹은 민족 문학의 맥을 연결하는 것들로서 강한 풍자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양반전(兩班傳)」의 경우는 조선시대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의 계급이 가지는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어 많은 문제점을 던져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북경을 여행한 이후에 쓴 두 편의 단편은 여행기 속에 포함된 것으로 역시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 그 중에서 「허생전(許生傳)」은 중상주의적 사상과 함께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이상향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박지원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와 함께 그것을 실제로 작품화한 실례가 될 것입니다.
  • 박지원의 저술은 모두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었습니다. 박지원이 가진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서, 실제로 1900년 김만식(金晩植) 외 23인에 의해 서울에서 처음 공간된 문집은 책을 초록한 형태였습니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가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음은 문집 내용이 갖는 의미를 짐작케 합니다.
  • 저술에서 특이한 점은 문집 대부분이 논설을 중심으로 한 문장이 대부분이며, 시는 각체를 합해 42수가 전부입니다. 이 점에 대해 아들 박종간(朴宗侃)은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권제4) 말미에 붙인 부기에서 유실되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교유한 문인들의 문집 속에도 박지원이 많은 작품들을 지었다고 하고 있어, 이 역시 유실되었음을 증명하는 한 예일 것입니다.
  • 저서로는 『열하일기(熱河日記)』, 작품으로는 「허생전(許生傳)」 · 「민옹전(閔翁傳)」 · 「광문자전(廣文者傳)」 · 「양반전(兩班傳)」 · 「김신선전(金神仙傳)」 ·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등이 있습니다. 1910년(순종 4)에 좌찬성<종1품>에 추증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네이버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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