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2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곳이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비바람이 창창할 뿐이니 한바탕 울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熱河日記

2024. 1. 11. 06:00마음공부_책_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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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기행루트

연재 2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2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곳이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비바람이 창창할 뿐이니 한바탕 울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熱河日記

 

드디어 조선시대 중상학자이자 실학의 대가 박지원 선생의 작품 열하일기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열하 피서지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영조의 부마이자 삼종(8촌)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 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입니다.

심양 고궁

연경사신단

규모 : 조선에서 청나라에 매년 4번정도 사신을 보냅니다. 왕의 책봉, 사망, 전란등 국내 특별한 사절 이외에 청나라 황실의 경조행사시 파견, 정기 사신단의 규모는 정사와 부사 및 개인 수행원인 자제군관과 역관, 화원, 의원등 40~50명은 기본이며, 마부 짐꾼등 도합 400~500명 수준입니다. 박지원도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사신길에 오릅니다.

 

숙박 : 연경과 같은 대도시는 당연히 사신단 객사가 있으나, 국경일대 간도 즉 구련성에서 책문까지는 봉금지대로 정해놔 노숙을 해야 했음. 날씨가 추우면 구덩이를 파고 온돌을 만들고 장막을 쳐서 노숙합니다. 늑대나 호랑이의 기습을 우려해 일제히 구령을 외치고 나팔을 불었다 합니다.

 

여행일정 : 박지원 사신단은 1780년 정조4년 5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여행을 했습니다. 한양~박천~의주~압록강~봉천~거류하~소흑산~북진~고령역~산해관~풍윤~옥전~계주~연경~밀운성~고북구~열하로 이어집니다. 사신단은 보통 하루에 60~100리를 걷고 4~5월간의 일정이 소요됩니다. 임무를 마친 사산단이 연경에서 피로를 풀고 쉰다는 핑계로 견문을 넓힐 기회를 만듭니다. 박지원도 이 기회를 잘 활용했지요.

각 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강록>은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잡지>는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筆談) 중심으로 엮고 있습니다. 

심양 고궁

<일신수필>은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관내정사>는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기록입니다. 특히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 虎叱>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입니다.

요양을 차지하고 중원을 넘보다

박지원은 랴오양을 천하의 판세를 장악할 수 있는 요지로 보아 중국 왕조가 바뀔때마다 랴오양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고구려 비사성, 건안성, 안시성, 오골성, 요동성, 백암성, 개모성, 신성이 중원판세의 요충지인 것이다.

요동성은 고구려-요-금(신라 김씨)-원-명-후금(청)의 순서대로 주인이 바뀌었다.

<막북행정록>은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입니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구외이문>은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입니다.

심양 고궁

<환연도중록>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금료소초>는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옥갑야화>는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연암골 호랑이

연암의 필력은 조선 최고를 자랑한다. 21세때 "방경각외전'을 썼다. 이 책은 몰락한 무반과 농민등 이름없는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삼은 한문소설이다. 29세때는 유언호, 신광온등과 금강산을 유람하고'총석정 해돋이'를 썼다. 30세때 홍대용이 중국을 다녀와 '건정동호우록'을 쓰자 그 서문을 썼다. 34세에 초시와 복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35세때 큰 누님이 죽자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을 짓는다. 이에 문하생 이덕무가 극찬한다.

뛰어난 지혜와 식견 앞을 내다보는 선각자의 혜안, 심금을 울리는 문장력, 말년에 보여준 뛰어난 행정력, 그가 탁월한 목민관 자질을 갖추었음을 보여주었다. 다만 중앙정부가 아닌 변방인 지방을 떠돌았던 것은 그의 기질 때문이었으리라.

<황도기략>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입니다. <알성퇴술>은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앙엽기>는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입니다.

심양 고궁

< 북경 종합시장 유리창 >

유리창은 천안문 광장 일대의 번화한 시장거리로 궁정에서 쓰는 기와와 벽돌이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런데 유리창은 유리공장 보다는 서적과 서화 골동품을 파는 시장으로 양쪽 점포가 2km에 이른다. 조선에 들어가는 서적은 거의 모두 여기를 통해 거래되었다.

 

<경개록>은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황교문답>은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입니다. <행재잡록>은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입니다. 그 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선시말>은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입니다. <희본명목>은 다른 본에서는 <산장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입니다. <찰십륜포>는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입니다. 

심양 고궁

<망양록>과 <심세편>은 각각 중국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필담>은 주로 천문에 대한 기록입니다. <동란섭필>은 가악(歌樂)에 대한 잡록이며, <산장잡기>는 열하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입니다. 

황실 내부

<환희기>와 <피서록>은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산장에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내용입니다. ≪열하일기≫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 北學議≫와 함께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다(如出一手).”고 한 평을 들었습니다.

심양 고궁

주로 북학을 주장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고, 당시에 정조로부터 이 책의 문체가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으나 많은 지식층에게 회자된 듯합니다.

열하의 온천

의의와 평가

종래의 연행록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기묘한 문장력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당시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하겠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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